[740호] 커버스토리ㅣ스포츠 반도핑과 유네스코
기울어지지 않은 운동장
깨끗한 스포츠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깨끗하지 못한 일들이 지나친 경쟁에서 비롯된 것임을 생각하면, 스포츠에서 경쟁을 없애버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호주에서는 지난 2014년부터 10세 이하 어린이들의 럭비 리그에서 점수와 승패 기록, 토너먼트와 개인상 시상을 금지했다. 하지만 스포츠 팬이라면 누구든 쉽게 짐작할 수 있듯, 해당 조치는 호주 내에서도 큰 논란이 됐다. 호주의 전설적인 농구 선수 앤드류 게이즈(Andrew Gaze)는 <에센셜 키즈>(Essential Kids)와의 인터뷰에서 “진짜 문제는 스포츠에 승패가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승자와 패자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라며, “단순히 점수를 기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스포츠에서 경쟁을 제한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이처럼 팬들과 관계자, 그리고 전문가 사이에서 의견이 나뉜다. 하지만 경쟁이 ‘평평한 운동장’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명제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올림픽과 같은 아마추어 스포츠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돈으로 움직이는 프로 스포츠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전 세계의 주요 프로 스포츠 리그는 공정한 경쟁 환경을 지키는 장치를 두고 있다. 샐러리캡(salary cap, 구단별 선수 연봉 총액에 상한선을 두어 돈 많은 구단이 좋은 선수를 독점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나 보조금 차등 배분(리그 스폰서십이나 중계권 판매로 얻은 수익을 하위권 팀에 더 많이 배당하는 것) 등이 그 예다. 이처럼 스포츠계는 ‘결과의 균등’보다는 ‘기회의 균등’ 측면에서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고, 그 위에서 수많은 영웅과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왔다.
보이지 않는 위협
공정한 경쟁 무대를 만들기 위한 제도적 장치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반면, 보이지 않는 곳에는 여전히 스포츠의 공정한 경쟁을 위협하는 요소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도핑(doping, 경기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약물을 복용하는 것)이다. 현대 스포츠에서 도핑은 승부 조작과 함께 가장 심각한 반스포츠 범죄로 간주된다. 이는 각고의 노력으로 평평하게 다듬어진 운동장 위에서, 특정 선수가 홀로 다른 ‘룰’을 갖고 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포츠에서 도핑이 불법으로 간주된 역사는 그것이 ‘나만 아는 비법’으로 활용된 역사에 비하면 대단히 짧다. 유네스코가 스포츠반도핑국제협약(International Convention against Doping in Sport)을 채택한 것이 2005년, 세계반도핑기구(World Anti-Doping Agency, WADA)가 설립된 것이 1999년,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부분 약물 검사가 시행된 것이 1968년이지만, 약물은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경기력 향상을 위한 선수들의 동반자였다. 스포츠 칼럼니스트 샐리 젠킨스는 <워싱턴포스트> 기고문에서 “고대 올림픽 챔피언들이 경기력 향상을 위해 환각제나 알코올, 동물의 생식기 등을 섭취한 기록이 남아있다”고 썼다.
선수들의 공공연한 약물 복용은 근대 올림픽에서도 이어졌다. 1904년 제3회 하계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토마스 힉스(Thomas Hicks)는 스트리크닌(중추신경흥분제)과 브랜디를 섞어 마시고 경기에 참가해 결승선을 통과하자마자 쓰러졌고, 의사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마크 S. 골드(Mark S. Gold) 미 플로리다대 정신의학대학장은 저서 <경기력 향상약물과 약물남용>(Performance-Enhancing Medications and Drugs of Abuse, 1992)에서 “스트리크닌, 헤로인, 코카인, 카페인 혼합물은 1920년대까지 선수들이 널리 사용하는 약물이었다”며, “코치와 팀이 ‘비밀 레시피’를 갖고 있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고 썼다.
악마의 유혹
1972년 올림픽부터 약물 검사가 전면 시행된 이후에도 선수들의 약물 복용은 근절되지 않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뒤흔든 남자 육상 100미터 금메달리스트(이후 박탈) 벤 존슨, 고환암을 극복하고 전설의 투르드프랑스 7연패(이후 해당 기록 전체 삭제)를 달성한 랜스 암스트롱 등이 대표적이다.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는 스포츠 현장에서 약물의 유혹을 선수들의 양심에만 맡겨두기란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1992년 미국의 밥 골드먼(Bob Goldman) 박사는 1982년부터 수년간 엘리트 운동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를 담은 저서 <라커룸에서의 죽음: 약물과 스포츠>를 통해 약물에 쉽게 현혹되는 선수들의 심리를 밝혔다. 해당 조사에서 골드먼은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들에게 “향후 5년간 모든 경기에서 압도적으로 이기게 해 주지만, 5년 후 반드시 죽게 되는 부작용이 있는 알약이 있다면 그것을 먹을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졌고,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약을 먹겠다”고 답했다.
‘골드먼의 딜레마’라 불린 이 연구는 스포츠계에 큰 충격을 줬고 약물과 관련한 다양한 후속 연구를 촉발시키기도 했다. 다행히 선수 대상 교육이 강화되고 약물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최근에는 ‘골드먼의 딜레마’를 정면 반박하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2013년 미국 육상 종목 엘리트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같은 질문에 약을 먹겠다고 대답한 선수의 비율은 일반인 대상 조사 결과와 비슷한 1%대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 연구에서도 ‘5년 후 죽게 되지만 그 약이 합법적인 경우’ 긍정 응답 비율은 6%대로 올라갔고, ‘부작용이 없지만 그 약이 불법인 경우’ 그 비율이 12%까지 올라갔다는 점은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디까지가 도핑인가
대다수의 현대 선수들이 약물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긍정적인 신호다. 하지만 최근 스포츠계는 약물이 비운 자리에 등장한 또 다른 위협을 목격하고 있다. 바로 거대 자본과 과학의 힘이 결합해 만든 ‘신기술’이다. 눈부시게 발전하는 최신 기술은 운동화나 유니폼 등에서 경기력의 차이를 만드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최상위 선수들의 신체적 능력이 평준화된 시대에, 이러한 차이는 곧 결정적 차이가 되기도 한다. 지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수영종목에서 화제가 된 전신수영복이 그 예다. 물의 저항을 줄이고 부력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전신수영복을 입은 선수들은 베이징에서만 25개의 세계신기록 중 23개를 갈아치웠다. 이 사실에 경악한 전문가들이 만든 용어가 ‘테크놀로지 도핑’(technology doping)이다.
이후 국제수영연맹은 전신수영복 착용을 금지했다. 하지만 해당 수영복을 입고 작성된 세계신기록과 금메달 기록은 여전히 공식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 사례를 바탕으로 앞으로 테크놀로지 도핑이 스포츠 당국에 얼마나 큰 골칫거리가 될 것인지를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규제는 언제나 한 발 늦을 것이고, 메달과 기록은 신기술을 ‘가장 먼저 착용(구입)하는 선수 몫’이 될 수도 있다. 에밀리 라이알(Emily Ryall) 영국 스포츠철학협회 부회장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옷과 신발부터 심리학과 식품영양학까지 오늘날 스포츠의 전 영역을 이끄는 것은 과학기술”이라며, “올림픽은 두 번 다시 공정한 경쟁의 장이 될 수 없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스포츠의 본질이란
“우리가 열광하는 대상은 선수의 경기력이 아니라 그 경기력 위에 드리워진 인간의 한계다.”
도핑과 윤리 문제에 대해 많은 질문을 받는 토마스 H. 머리(Thomas H. Murray) 세계반도핑기구 윤리위원회 의장의 말이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스포츠의 공정성이 훼손 위협을 받는 지금, 이 말은 우리를 다시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서의 스포츠’ 이야기로 돌려보낸다. 또한 도핑을 둘러싼 다양한 논쟁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스포츠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내놓아야만 끝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